방법론19분 읽기

사회를 점으로 그린다 — 합성패널의 상징

이 그림의 점은 합성패널 한 명이 아니다. 통계를 그린 것이 아니라 관점을 그렸다 — 사회를 덩어리가 아니라 개인의 합으로 보는 시선에 대하여.

목차

Reble.ai는 현실 세계를 반영하는 동적 사회 시뮬레이션 엔진이다. 그 엔진이 세상을 어떻게 보는지를 숫자로 설명한 글은 이미 여러 편 있다. 이 글은 그림 이야기다 — 엔진의 관점을 한 장면으로 옮기면 무엇이 되는가.

원본 그림 — 합성 시민 군중

Reble · Synthetic Citizens

합성 시민.

군중은 덩어리가 아니라 각자 움직이는 점들의 합이다. 그 점들을 다시 모으면 사회가 된다.

표본 추출 중…
0
시민
대기
상태
0fps
프레임
100%
42,000
28%
30%

먼저 분명히 해 둔다. 화면의 점 하나는 합성패널 한 명이 아니다. 점의 자리는 인구 데이터가 아니라 한 장의 그림에서 왔고, 개수도 그리는 사람이 정한 값이다. 여기서 통계를 읽으려 하면 아무것도 읽히지 않는다. 그린 것은 데이터가 아니라 관점이다. 그러니 이 글도 그림을 데이터로 해설하지 않고 그림으로 읽는다.

멀리서는 형상, 가까이서는 낱낱

REBLE의 통계적 시민들을 조르주 쇠라(Georges Seurat)의 팔레트에 담긴 색들이라고 생각해보자. 서로 다른 색이 캔버스 위에 점으로 놓이듯, 저마다 다른 생각과 삶의 조건을 가진 시민들이 이 화면을 채운다. 멀리서 보면 점들이 어우러져 여론이라는 풍경을 이루고, 가까이 다가가면 그 풍경 속에서 생각하고 선택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보인다. 함께 하나의 그림을 이루지만, 각자의 색은 사라지지 않는다.

합성패널의 구조가 정확히 그렇다. 권역·연령대·성별·이념만으로 4,433명1을 나누면 유형은 202개다. 학력·직업·소득·혼인까지 넣으면 3,249개로 늘어난다. 한 유형에 평균 1.36명 — 가까이 가면 거의 모두가 다른 사람이다.

멀리서 보면 202개의 집단, 가까이서 보면 4,433명의 서로 다른 시민.

여론을 하나의 숫자로 말하는 방식은 멀리서만 본 그림이다. 43%라는 말에는 43%인 사람이 없다. 점묘가 회화에서 한 일을 합성패널은 여론에서 한다 — 형상을 지우지 않으면서 낱낱을 되돌려 놓는 일.

세 가지 재료로 그린 초상

합성패널 한 명의 기록에는 22개의 칸이 있다. 미술로 치면 한 인물을 세 재료로 그린 셈인데, 무엇으로 그렸는지를 숨기지 않는다.

재료 칸 어떻게 얻었나
관측 10 거주지·성별·나이·학력·직업·소득 — 인구총조사에서 본 것
예측 4 이념·지지정당·정치관심도·투표의향 — 모델이 짐작한 것
계산 8 가중치·확률·셀 비중 — 시스템이 셈한 것

본 것과 짐작한 것을 같은 붓질로 칠하지 않는다. 짐작한 칸에는 확신의 정도가 함께 적힌다. 지지정당이 더불어민주당으로 적혀 있어도 옆에는 0.565가 붙는다. "이 사람은 민주당 지지자다"가 아니라 "그렇게 분류될 확률이 56.5%다." 초상화가 얼굴을 확정하는 장르라면, 이것은 확정하지 않는 것을 그리는 초상이다.

물감의 두께도 균일하지 않다. 표본과 실제 인구의 지역 분포가 달라, 한 명이 대표하는 실제 인원이 지역마다 다르다. 광주·전라의 한 명은 약 670명, 강원·대구·경북의 한 명은 약 229명. 같은 스무 점이라도 어디에 찍혔느냐에 따라 2.4배의 무게 차이가 난다. 같은 크기의 점이 같은 무게일 것이라는 짐작 — 그것이 이 화면이 남겨 둔 가장 큰 생략이다.

어긋난 색은 실수가 아니라 주제다

원본에는 인쇄가 어긋난 자국이 있었다. 붉은 층과 초록 층이 본체에서 조금씩 밀려 찍힌, 인쇄소라면 폐기 사유가 될 얼룩이다.

지우지 않았다. 지우는 대신 깊이로 옮겼다. 두 층은 본체보다 뒤에 있고, 시점이 흔들리면 그만큼 벌어진다.

20세기 화면이 망점과 색분해 오차를 회화의 주제로 끌어들인 것과 같은 동작이다. 기술의 결함을 감추지 않고, 그것이야말로 이 매체가 세상을 보는 방식이라고 말하는 것. 여기서도 그렇다. 밀린 폭이 곧 확률이다. 정면에서는 한 덩이, 각도를 틀면 갈라짐 — 확률이라는 것의 생김새가 그렇다.

정지한 군상은 없다

군상(群像)을 그린 그림은 대개 정지해 있고, 그 안에 주인공이 있다. 이 화면에는 주인공이 없고 멈추지도 않는다.

흩어지면 각자의 궤도를 도는 개인이고 모이면 군중의 형태가 되는데, 모여 있는 동안에도 점이 계속 미세하게 움직인다. 형태가 완성된 뒤에도 멈추지 않는다. 여론조사가 찍는 한 장의 스냅샷이 놓치는 것이 정확히 그것이다 — 사회는 완성된 형상이 아니라 계속 다시 만들어지는 형상이다.

포인터를 올리면 그 자리의 점들이 비켜선다. 관측이 대상을 건드린다는 사실도 화면에 넣어 두었다.

남는 말

이 그림이 하는 주장은 하나다. 사람을 세는 일과 사람을 그리는 일은 다르지 않아야 한다.

여론을 하나의 숫자로 줄이면 그 안의 사람이 사라진다. 개인을 하나하나 두고 그 합을 보면 숫자는 조금 늦게 나오지만 누가 움직였는지가 남는다. 엔진이 택한 쪽이 그것이고, 이 화면은 그 선택을 눈으로 보이게 한 것이다.

만드는 과정 전부는 합성패널은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떻게 답하는가에 열어 두었다.


  1. 이 4,433명은 Reble의 한국인 합성패널 79만 4,000명에서 출발해, 2026년 더불어민주당 전당대회 당대표 경선에 쓰려고 실제 권리당원의 지역·성별·연령 구조를 대표하도록 세운 민주당 권리당원 합성패널 4,433명을 가리킨다. ↩